“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시종들이 두 사람을 대신해 문을 열어주었다. 가주 내외, 크무트와 잉겐은 이미 방 한켠에 마련된 거대한 쿠션에 몸을 기댄 채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과 달리 램프의 밝은 불빛에 두 사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다이애나는 잉겐 부인의 분위기와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비늘의 아름다운 색깔과 광택은 분명 가주인 크무트에게 물려받았으리라. 두 사람의 뛰어난 외모와 유전자와 비교하자면, 소녀가 물려받은 유전자는 상당히 볼품없었다. 피부를 덮은 비늘은 그 수가 적을뿐더러 길이도 짧았고, 견갑골 역시 두드러지게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늦었구나, 다이애나. 우린 이미 기도를 드렸단다.”

“죄송해요, 어머니.”

그녀는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늘 재봉 수업은 어땠니?”

“좋았어요. 새로운 장갑도 하나 만들었어요.”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띠며 손을 들어 장갑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장갑을 끼고 어떻게 식사를 하려고 그러니? 더러워지면 어쩌려고. 얘야, 벗고 있으렴.”

“윽……”

소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이게 부모님이 내리는 테스트인지 묻는 것처럼. 그러나 레이저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재빨리 부모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장갑은……제….”

“아이가 난처해하잖소, 잉겐.”

크무트가 쉬익 소리를 내며 말을 끊었다.

“다이애나는 오지 않았지만, 우리끼리라도 식사합시다.”

“하필 이럴 때 제멋대로 굴다니,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레이저. 그 아이가 우리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겠지요?

“아가씨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아……왕위쟁탈전이 벌어진지도 벌써 5년인데. 우리 아이도 그걸 자각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자각이라니. 다이애나는 고작 14살이잖소. 아이에겐 나중에 차근차근 말하리다. 급할 것도 없잖소, 부인.”

“각오는 빠를수록 좋잖아요. 됐어요, 크무트. 그만 주셔도 돼요.”

부부는 음식을 집어 식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소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할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실수로 자기 자리 옆에 놓인 잔을 발로 쳐 넘어뜨리고 말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소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머,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 아니야, 얘야. 앉거라. 지금 일어나봤자 오히려 하인들이 수군댈 게다. 같이 들자꾸나.”

잉겐은 소녀에게 손짓하며 만류했다. 손목에 찬 화려한 팔찌에서 청아한 소리가 났다.

“전병 좀 들겠니? 아니면 갈비는 어때? 아니다, 네가 직접 먹고 싶은 걸 고르렴. 물론 다이애나라면 가장 먼저 갈비를 먹겠지만, 그건 다이애나가 가장 좋아하는 거니까. 알겠니?”

“자자, 부인. 적당히 하시오.”

부부는 자기들끼리 식사를 계속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음식을 먹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불편한 채로 시간을 보냈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이 돼서야, 크무트는 잡담을 그만두고 왕위쟁탈전을 다시 화두로 삼았다.

“2주 뒤에 연회를 열 생각이다.”

그것은 레이저와 그녀를 향해 꺼낸 말이었다.

“네.”

그녀는 그 사안에 대해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저택의 하인들이 늘 분주한 상태였다. 특히 주방에서 일하는 자들은 더더욱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미리미리 식자재를 준비해둬야 당일 연회가 차질 없이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왕위계승 후보자 중 하나가 또 자살했단다.”

잉겐은 차를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보건데, 사인은 자살이 아님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다섯 명의 후보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어. 그중 두 가문은 아예 멸족에 이를 정도였고. 정말이지 무시무시한……사고야.”

그녀는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잉겐의 말에 배가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