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레이저는 이미 상의를 벗어 응급치료를 마치곤 다
시 망토로 몸을 두르는 중이었다.
“가자. 서둘러 가주님께 보고를 드려야지.”
레이저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론 훈련 장소를 바꿔야겠다. 저택이 높은 곳에 있으니 적들이 함부로 쳐들
어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후문 쪽으로 잠입하려던 모양이군.”
“선생님, 방금 전에 저 보고 잘했다고 하셨죠.”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내가 그랬나?”
레이저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 그렇게 말했다고 해두지.”
“그럼 저 할 수 있는 거죠? 대역 임무 말이에요!”
소녀의 말투가 점점 환희에 찬 목소리로 바뀌어갔다.
“너 뭔가 내가 방금 전에 말했던 말의 의미를 오해하는 거 같은데.”
레이저는 얼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칭찬한 게 아니라, 떨고 있던 네 녀석을 위로해준 것뿐이다.”
“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손으로 직접 도마뱀 일족을 죽였잖아요!”
“그래. 처음으로 살인을 했지. 패닉에 빠질법하지.”
“그런 적 없거든요!”
“오, 그래? 그럼 더 빨리 떠날 수 있겠군.”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혼자 훌쩍 떠났다.
“앗! 기다려요!”
그녀는 레이저의 반응에 화를 씩씩 내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어디서
솟아난 용기인지 갑자기 레이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을 회전시키면서 꼬리를
이용해 힘껏 그의 종아리를 내려쳤다. 레이저가 꼬리에 차여 땅바닥에 넘어졌다.
소녀는 이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쓰러진 남자를 덮쳤다. 비늘이 듬성
듬성 난 꼬리 끝을 이용해 레이저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그 상태로 힘껏 꼬리를
내려치기라도 한다면, 무방비한 상태의 살덩이 정도는 손쉽게 찢어발길 수도 있
었다.
“뭐하는 거야!”
“선생님을 이겼어요!”
“뭐?”
그는 멈칫했다.
“선생님이 말했잖아요, 자기를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요! 그래서 그대로 했어요!
자, 이제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레이저는 잔뜩 흥분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어이를 잃었다. 잠깐 머리를 식히고
서야 소녀의 행동이 무슨 짓인지 깨달았다.
“이런 젠장…….”
“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레이저는 그녀의 꼬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꺅!”
깜짝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고통이 순간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
다.
“아파요! 아프다구요!”
그녀는 몸부림치면서 레이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꼬리를 꽉 잡힌
탓에 소녀는 땅바닥에 엎드려 바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마저
찔끔 흘렀다. 만약 다른 도마뱀 일족에게 이런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다면 부끄러
워서 죽을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절대, 자기 꼬리를, 적에게, 보이지 마라.”
레이저는 그녀가 여태껏 들어본 중에 가장 차갑고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는 꼬리를 잡고 그녀를 아예 대롱대롱 들어올렸다.
“알겠나?”
“선생님 너무해요……아팟! 아파요!”
“알겠냐고 물었다.”
“알겠어요!”
그는 흥, 코웃음 친 뒤 소녀를 모래 위로 내던졌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성큼성
큼 앞서 갔다.
레이저에게 혼쭐이 난 소녀는 전투로 격앙된 감정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이전
처럼 유약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꼬리를 부여잡은 채 레이저를 졸
졸 따라가며 울먹였다.
“흑……흐윽…….”
“젠장, 질질 짜지 마라! 대체 뭘 그렇게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냐!
그는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제가 가주님께 쓸모없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구요!”
“그건 어차피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물곤 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