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가장 먼저 전전대 국왕, 루벤스·유진·고메즈 폐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
군요. 블러드팽 왕조 시대, 왕위쟁탈전에 나선 후보자는 겨우 6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지요. 가문이 추천할 수 있는 후보자는 일반적으로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루벤스 폐하의 누이였던 말락이 가문 몰래 참가신청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지요.”
“원칙대로라면 한 가문은 한 사람만을 후보로 선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말락은
자신이 모계 측의 가문을 대표하여 출전하겠다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그녀의 모
계 가문이 후보자를 내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법률의 허점을 파헤친 사건이었습
니다.”
“혹자는 말락이 자신의 능력을 썩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벌인 일이라
고 말하기도 하지요. 루벤스 폐하는 당시 모든 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가장 유
력한 왕위계승자였기에, 쟁탈전에 참가하고자 하는 이가 적을 수밖에 없었죠. 아
니면 아예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거되던가요. 그러니 쟁탈전에 뛰어든다면,
그리고 루벤스 폐하만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 즉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루벤스 폐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구요.”
그녀는 침착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경쟁자를 제거할 기회라면 말락보다 많은 이는 없었겠죠. 그렇다
면 아가씨라면, 말락을 어떻게 처리했겠습니까?”
“선수를……치는 건가요?”
“그게 바로 루벤스 폐하의 해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반 년 동안 말락에게 보냈던
두 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오히려 역으로 그분께서도 세 번이나 암살
을 당할 뻔 하셨지요. 만일 계속 승부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을 흘려보냈
다면, 가문이 내분으로 무너져 내린 틈을 타 다른 자들이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
습니다. 그때, 루벤스 폐하의 운명에 전환점이 찾아왔지요.”
하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지도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도에는 당시
의 사막왕국의 영토와 세력범위, 그리고 거점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시기 왕국은 아직 인간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습니다. 유진 가문은 국
경지대의 무역 거점 대다수를 점유하고 인간들과 교역을 했지요. 그런데 국경 인
근에서 인간들의 캐러밴이 무장강도에게 습격을 받아 무려 50여 명의 인간이 죽
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지요.”
소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사건이 왕위 쟁탈전에 무슨 영
향을 미쳤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을 핑계 삼아 인간 왕국의 습격이 시작되자, 유진 가문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인간들과 응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과 왕국간의 충돌이 빗발쳤지
요. 루벤스 폐하는 주전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말락은 그 의견에 반대를 표명하
며 인간들과의 회담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남매가 갈라져 두 개의 대립 세력을 이루게 되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락의 주장은 대중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
느 날 그녀는 시장을 시찰하던 도중 분노한 민중들의 습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사
망하고 말았지요. 물론 그건 루벤스 폐하의 계책이었고요. 그분은 민심을 뒤흔들
었고, 민중들 하나하나를 말락을 살해할 암살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냥 기뻐할 수는 없네요……가문 간의 분쟁은 끝났지만, 이로 인해 인간과 사
막왕국 간에 불화의 씨앗을 심은 셈이니까요.”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부터 두 국가 간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
으니까요.”
하사드의 칭찬을 들었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특별히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두 나라의 관계를
돌이켜 생각하면, 전쟁이 왕국에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