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도마뱀 일족 대다수는 전쟁의 계기가 된 사건을 인간들이 만들어낸 자작
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론 역시 그런 관점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만.”
하사드는 슬쩍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려는 듯
했다.
“뭐, 진상을 밝히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요. 그렇지요, 아가씨?”
시종일관 가만히 서 있던 레이저였지만, 하사드의 말을 듣고 난 뒤 희미하게 코
웃음을 쳤다.
하지만 소녀는 방금 전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뒤엔 어떻게 됐죠?”
그녀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루벤스 폐하는 왕위에 오른 뒤 한때 자신의 친척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요. 친족들로부터 암살될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
만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폐하는 중병을 앓다가 붕어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이어진 정권도 끝나게 됐지요.”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아가씨 말씀은, 루벤스 폐하와 말락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고작 반년 사이에 세 번이나 암살당할 뻔했는데, 그게 어쩌면 친누나가 보
낸 자들일지도 모른다니……그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렇군요. 루벤스 폐하는 임종하시기 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지요. 사서
에도 기록된 말입니다. <기쁨은 근심이 됐고, 두려움은 의혹으로 바뀌었으며, 공
포는 분노로 화했다>. 어쩌면 그게 그분의 삶의 철학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그녀는 루벤스의 유언을 웅얼거리며 곱씹었다. 어쩐지 조금 울컥했다.
그것이 왕의 고뇌이자 왕의 길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어둡고 가혹하지 않은가.
“제 수업이 아가씨께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 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도 내
면의 두려움을 피할 수는 없지요. 아가씨라면 그 두려움을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
는 힘으로 바꾸실 수 있을 겁니다.”
“……왕도 두려움을 느낄까요?”
그녀는 상상이 잘 안 됐다. 당장 다이애나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
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모두 공포를 느끼지요. 두려움은 필수불가결한 본능입니
다. 두려움은 생물을 움직이게 하고 대처하게 하죠. 두려움이라는 자극이 없다
면, 우리는 평생 살아남지도 적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가요……공포와 마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라…….”
“그렇습니다. 이를 외면하거나 억누르기만 한다면, 이는 오히려 왜곡되어 잘못
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입니다.”
하사드는 슬쩍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가벼운 느낌으로 툭 내뱉었다.
“사실 다이애나 아가씨, 지금 당장 저도 매우 두려운 걸요.”
“뭐가요?”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수업 시간이 한참 전에 지났거든요! 아가씨의 호위병이 눈빛으로 절 위협하고
있군요.”
소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그녀는 하사드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사드는 왕위계승전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인지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화두를 굳이 수면 위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도. 방금 전의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그녀에겐 충분히 무거운 짐이었으리라.
자기 친누나조차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굴 신뢰할 수 있단 말일까? 소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을 일깨웠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 그
것이야말로 왕위쟁탈전의 무시무시함이었다. 그런 고독의 결과물이 국왕의 정
책, 그리고 국왕이 백성들을 대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력갱
생’은, 왕관을 쓴 자에게도, 그리고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유
효한 생존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