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해할 수 없어요……평소엔 늘 저 보고 목숨을 바치는 걸 망설이

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아는 것과 충성을 바치는 건 별개의 일이다. 혼동하지

마라. 그걸 확실히 깨닫지 못한다면, 넌 영원히 다이애나 아가씨처럼 될 수 없어.

그게 어렵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대역 역할을 때려치워라. 후안 가문의 시간을 낭

비하지 말고.”

그녀는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레이저의 완강한 뒷모습이 두려웠다. 언제나 차갑고, 칼 같이 선을 긋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어둠을 끄집어냈

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하사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그

녀에게 알 수 없는 용기를 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순 없었다. 그녀

는 자신의 악몽을 마주해야만 했다.
 

“……아니요,”

레이저가 뒤를 돌아봤다.

소녀는 꿋꿋이 서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레이저를 직시하는 눈빛엔 분노와 공

포, 그리고 극도의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틀리지 않았어요……아무것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소리냐.”

“왜 혼동하면 안 되는데요? 그분들은 제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에요! 그분들이

저를 장기말로 여기더라도 상관없어요. 그게 제가 바라던 거니까요!”

그녀는 몸을 잔뜩 부풀린 채 크게 소리 질렀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듯이.

“저는 후안 가문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가문의 미래를 지키고 싶을 뿐이에

요……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요.”

“미련하기 그지없는 생각일 뿐이다.”

“선생님……당신……!”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머릿속을 쥐어짜내 자신이 아는 최대한 심한 말을 끄

집어냈다.

“어떻게 그렇게 무도한 말을 할 수 있으세요!”

“그렇게 들리는 것도 당연하지. 내 말은 사실이니까.”

“제가 아가씨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신다면……더 노력할게요!”

그녀는 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더 아가씨처럼 행동할 거라구요……증명하고 말겠어요……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요!

“하, 그래?”

그는 팔짱을 낀 채 뒤돌아섰다. 그리고 소녀를 향해 걸어왔다.

“날 말로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니, 대신 다른 설득 방법을 알려주마. 상대를 쓰러

뜨려. 그게 네 생각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저히 쓰러트릴 것 같지 않은 그

거대한 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뻗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가볍게 몸을 비틀며 소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물열매나무 숲속

으로 끌고 갔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멀리 떨어진 사구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선생님?”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저 멀리서 무언가 인기척이 느껴졌고,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숲속으로 들어오려는 놈들은 대략 5, 6명, 종족은……”

레이저는 숲을 가리키며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도마뱀 일족인 것 같군.”

“인 것 같다구요?”

“도마뱀 일족이라면 꼬리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하지만 꼬리를 최대한

치켜든 채 접근하고 있다면, 인간 발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놈들이 더 가까이 다가와야 해.”

“전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요.”

그녀도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그는 소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녀를 밀어냈다.
 

“ᅳ도마뱀 일족이다. 계속 아가씨인 척 해라.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무슨 일이ᅳ”

그녀는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사구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

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다가오는 놈들을 본 소녀가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