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말로 그런 결론을 낼 줄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
었다.
“제, 제 말은, 그 분이 후안 가를 비판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자기 입으로 후안 가문에 충성한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
뒤돌아선 다이애나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꼬리를 살랑였다.
“어떤 말도 안했다는 건,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그런가요…….”
“지난번 호위병들을 떠올려봐. 그놈들이 무슨 암살을 저지르려고 했던 건 아니
잖아? 그냥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서 밥을 빌어먹으려고 했을 뿐이지. 쓸모없
는 놈들이었어. 널 제대로 가르쳤길 했어, 그렇다고 날 제대로 지키길 했어?”
다이애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까 경각심을 가지란 말이야. 레이저가 못미덥다면 언제든 내게 말하라
고.”
“아, 알겠습니다.”
다이애나는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조금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
투도 꽤나 나긋해졌다.
“이제 하사드에게 수업을 들으러 가야지? 가봐. 늦지 않게.”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제 수업 횟수를 줄일까요?”
“무슨 소리야? 네 머리로 수업까지 안 들으면 어쩔 생각인데?”
“하지만 제가 수업을 듣고 있을 때면 아가씨가 계속 방에서 기다리셔야 하잖아
요.”
“수업만 끝나면 내 시간이잖아? 고작해야 하루에 몇 시간뿐이고.”
다이애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난 방에 있는 편이 더 좋아. 하루 종일 장갑이라도 만들고 있지 뭐.”
소녀는 손을 움츠렸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불쾌감을 아예 감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소녀 앞에 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과 똑닮은 눈을 바라보다가,
소녀의 턱을 잡고 치켜들었다.
“너나 나나 자유의 몸이 아니잖아, 손 병신. 한시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야 자유
로워질 수 있ᅳ”
다이애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더니, 턱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소
녀의 얼굴에 떠오른 겁먹은 표정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아니, 그래봤자 자유로워질 수도 없겠구나.”
그녀는 말없이 창가로 걸어간 뒤, 더 이상 3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소녀는 아가씨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가 문을 열자 자그마한 통로가 보였다. 그녀는 그 통로를 통해 다이애나의
진짜 방에 드나들었다. 문을 닫기 전, 그녀는 다시 눈길을 돌려 다이애나의 뒷모
습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창가에 기댄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높은 저택 아래의 오
아시스와 사구들이 늘어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햇살 속의 아가씨는 마치 성
스러운 빛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의 자유 속에 내비친 그 쓸쓸
함이라니. 웃음기 없는 아가씨는 너무나도 고귀해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소녀는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오직 그녀만이 그
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다이애나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