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던 레이저는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문에서 교실까지의 루트를 제외하면 하사드는 다른 방에 출입하는
걸 허락받은 적이 없었다. 함부로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간 죽임을 당해도 할 말
이 없었다. 설령 그가 후문이나 다른 출구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곳은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사드의 속도라면 호위병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도망치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도 그가 길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저 궁지에 몰려 도망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저택 내부 구조를 모두 파악하
고 있는 것인가? 두 가지 상황이 가진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둘 중 어떤 것이 맞든,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다이애나의 안전이었
다.
레이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참 우회해 돌아가야 하는 복도로 향하
는 대신, 가장 가까운 비밀통로를 통해 저택 내부로 향했다. 그는 가주와 다이애
나의 개인 방이 있는 길목 앞에 도착했다. 숨겨진 문을 닫은 뒤 조금 더 나아가자
시녀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복도가 나왔다. 침실 바깥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문 앞엔 이제 막 침실 청소를 마치고 나온 시녀 한 사람뿐이었다. 주변은 어떤 소
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저 멀리 로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
거리는 소리만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레이저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인간 시녀가 바짝 긴장한 채
몸을 곧추세웠다. 레이저가 나직한 목소리로 시녀에게 물었다.
“누군가 여기 온 적이 있나?”
“아, 아뇨. 설마 누가 저택에 침입했나요?”
“그래. 녹색 비늘에, 키는 나보다 조금 작고, 꼬리가 잘린 흔적이 있는 놈이다.
놈을 목격하면 바로……제기랄.”
레이저가 시녀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눈
앞에 있어선 안 되는 자가 보였다. 다이애나가 저 멀리 복도 끝에 서 있었던 것이
다. 시녀조차 대동하지 않은 그녀가 미심쩍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
다.
“레이저, 하사드에게 가본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가씨, 제가 분명히 방에서 나오시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레이저는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 앞으로 뛰어갔다.
“그래요. 하지만 아버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하사드가 저택 내부로 침입했습니다. 서둘러ᅳ”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다이애나를 붙잡
았다. 날카로운 비수가 목덜미에 닿자 다이애나와 시녀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
다.
“움직이지 마!”
다이애나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날 끝부분이 목덜미 비늘 틈으로
파고들었다.
레이저가 발걸음을 멈췄다.
“칼 내려놔, 하사드.”
레이저는 손을 들어 올리며 자기 손에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다른 한 손
으로는 시녀를 가로막아 돌발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당신은 지금 냉정을 잃었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
지.”
“아니……이게 무슨 짓인지 잘 알고 있어.”
이를 꽉 깨문 하사드가 거친 숨을 토해내자 다이애나 귓가의 머리카락이 흔들
렸다.
“아니, 당신은 몰라. 칼을 그런 각도로 내찔러봤자 고작해야 목구멍에 생채기나
내겠지. 제대로 하려면…….”
레이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동작을 움직였다.
“ᅳ비수를 가로로 쥐어야지. 그래야만 동맥을 정확히 노릴 수 있단 말이다.”
“레이저! 이 배신자!”
하사드에 품에 안긴 소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하사드
는 잠깐 고민하더니, 레이저 말대로 따라했다. 칼날이 더욱 바짝 다이애나의 목
덜미에 가닿았다.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두 눈에서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진짜’가 아니란 건가?”
하사드는 머뭇거리면서, 소녀를 끌어안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다이애나 아가씨는 세상에 단 한 분뿐이지.”
레이저는 입을 비죽이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진정했으면 대화나 좀 하지. 뭘 바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