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레이저의 목소리가 문 바깥에서 들려왔다.
“지금 가요.”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얇은 베일을 얼굴 위로 드리우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직 레이저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았다.
아가씨의 대역 역할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저도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소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수행할 뿐이었고, 그런 그를 보면서 소녀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날 그의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소녀의 충성심을 떠보려는 것이었을까……?
“무슨 일이십니까?”
소녀의 표정을 본 레이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은 로비에 사람들이 많아 북적이니, 기도실 쪽으로 돌아서 가지요. 곧장 상석으로 모시겠습니다.”
레이저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그녀의 몸가짐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고로 상석에서 가장 가까이 앉은 분은 오마르 장군이십니다. 연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취해 계시더군요. 그 옆에 앉으신 분은 에미르카샤님과 그분의 둘째 부인이십니다. 연회에 준비된 주류가 부족하다고 불평하셨습니다.”
“……장군이시라고요? 그분은 예전부터 절 특별히 챙겨주셨죠. 잠깐 시간을 내서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그녀는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시녀장에게 며칠 동안이나 특별 수업을 듣느라 소녀는 다른 수업들을 잠시 멈추었다. 단시간에 귀빈들의 신분과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숙지해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레이저의 말은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주워 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건 소녀에게 손님들의 위치와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소녀는 그걸 깨닫고 자연스레 행동했다.
두 사람은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주 내외의 환대를 받으며 연회장의 상석으로 향했다. 소녀는 부부 사이에 앉았고 레이저는 뒤로 물러나 벽 구석에 섰다. 손님들은 곧장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베일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걸 금방 눈치 채고 말았을 것이다.
잉겐은 다정하게 소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향해 잔을 들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오찬에도 금쟁반 위의 음식들은 계속 채워지고 있어 조금도 줄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단지 연회장 중앙에 놓인 거대괴수 바비큐만 눈에 띄게 줄어 있을 뿐이었다.
손님들은 좌우로 나눠 앉아 있었는데, 계급이 낮을수록 바깥 자리에 앉았다. 계승권을 가진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은 수수하나 우아함을 풍기는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양탄자 위에 앉아 있어도 그들의 존재감은 여전히 뚜렷했다. 소녀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머릿속으로 모든 이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하지만 소녀가 환영사를 읊을 시간이 다가오자, 귀족들 몇몇이 냉랭한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다이애나가 모습을 보인 것마저 흥미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을 살펴보았다. 귀빈들과 가신들의 의복엔 그들의 영지 특유의 장미꽃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장중의 들뜬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냉랭한 모습을 보니, 어쩌면 저들이 바로 시녀장이 말했던 새로운 손님들일지도 몰랐다. 지지하던 다른 후보자가 죽은 뒤 후안 가문의 세력에 들어오고자 한다는 할리파 가문 말이다.
“얘야, 네가 나설 차례란다.”
잉겐의 차례가 일단락되자, 소녀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게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