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잔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손이 떨리는 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탁자에 팔을 걸친 채였다.
“왕국에 눈부신 공헌을 바쳐 오신 여러분. 다이애나·후안·고메즈는 후안 가의 왕위후보자로서, 진심으로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리를 빛내주심은 제 영광입니다. 부디 편안히 연회를 즐겨주시길 바랍…….”
준비한 환영사의 절반밖에 말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외워두었던 대본들이 한 글자 한 글자씩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소녀의 호흡이 가파져 오는 걸 본 잉겐이 즉시 반응했다. 그녀는 재빨리 소녀의 손가락을 살짝 잡아당겨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눈치껏 박수를 쳤다. 인상적인 환영사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긴장한 것을 분명하게 눈치 채고는 격려하듯 열정적으로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할리파 가의 가주만은 조롱하듯 비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던 소녀는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이애나의 존재 이유는 단지 ‘후안 가의 왕위주장권’일 뿐이라고.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여전히 후안 가의 부부였고, 연회에 모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녀의 서툰 모습에도 너그럽게 넘어갈 뿐이었다. 할리파의 가주는 분명히 그 점을 비웃고 있었다.
장중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걸 본 크무트가 손을 내흔들었다.
“그럼 계속해서 만찬을 즐겨주시기 바라오! 자, 무희들도 계속ㅡ”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한 마디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크무트와 가까이 앉아 있던 상인 하나가 일어섰다. 볼품없는 몸매에 키가 작고 갈색 비늘을 가진 도마뱀 일족이었다. 오히려 그가 걸치고 있는 금색과 백색이 뒤섞인 옷과 장식품들이 본인보다 훨씬 이목을 끌었다. 소녀는 그자가 왕국 최대의 물열매나무 농장을 운영한다는 걸 기억해냈다.
“우마르.”
크무트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표했다.
“일어나십시오. 저와 후안 가의 우정이 깊음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아는 바가 아닙니까. 후안 가의 승리가 바로 저 우마르의 승리이지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걸어다녔다. 그러다 실수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밟을 뻔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일부는 처음 오셨을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여러 가문 중에 누굴 지지할지 관망하고 계시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와 성의는 꼭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여러분의 선택이 정확했단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진정하게, 우마르. 자네 덕분에 이 맛있는 요리들이 부담스러워지고 있지 않나!”
맞은편에 앉은 덩치 큰 도마뱀 일족이 우렁차게 웃으며, 뒷다리살을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다.
“하하, 이 말은 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샤킬 씨. 전 진심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다만……저분들의 엄숙한 표정이 얼마 전에 죽은 친족을 향한 애도일 뿐이라면,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지요.”
자기 말고도 누군가 할리파 가문의 태도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녀는 상인의 도발적인 언사에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 발언을 듣고 저마다 수군대고 있었다. 오직 할리파 가문의 가주만이 화를 낸 기색 없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쥐방울만한 상인이 손님에게 삿대질을 하게 되었는가?”
할리파의 가주가 쉬익-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그건 다 내 덕분이지! 이몸이라면 자네에게 삿대질을 할 자격이 있을 듯한데.”
샤킬이 입을 쫙 드러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할리파의 가주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수흐 가문의 발톱은 언제든 자네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네!”
“못 배워먹은 수흐 가였나……왕위 계승 자격도 없는 방계 친족 주제에, 감히 ‘가문’을 자칭한단 말인가?”
할리파의 가주는 고개를 휙 돌리며 샤킬과의 논쟁을 거부했다.
“우리 가문은 오늘 금화 열 상자를 선물로 내놓았네. 이쯤 되면 성의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음, 고작해야 돈이잖소. 그쯤이야 나 일프가 내놓은 게 더 많다오. 편을 잘못 고른 가문이 다른 자에게 의탁하려면 더욱 구미가 당기는 선물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소?”
중간쯤에 앉은 회색 비늘의 도마뱀 일족이 쉬익-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부드러운 말투로 절묘한 시기에 논쟁에 끼어들은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비쳤다. 그가 두 손을 내뻗자, 손가락마다 끼워둔 보석 반지가 수수한 하얀 옷 사이에서 모습을 내밀었다.
“한 번 해보자는 건가?”
할리파의 가주가 고개를 돌리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의 뒤에 있던 가신들이 그를 따라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