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다이애나의 방으로 돌아와 해질 무렵에 열릴 행사를 준비했다. 이어질 행사에 대한 부담감은 꽤 많이 덜어낸 상태였다. 적어도 소녀의 활약 덕분에 가주 부부의 오후 사교일정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으니까.
“어떻게 그런 수를 떠올린 거냐?”
레이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갑자기 그분한테 칼을 던지고 싶었달까요?”
그녀는 반쯤 농담하듯 말했다.
소녀의 농담에 남자는 웬일인지 빙긋 웃었다. 늘 딱딱하고 차가웠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져 보였다. 소녀는 그 미소를 바라보면서 인간이었다면 레이저의 웃는 모습을 멋지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택의 인간 하인들이 틈만 나면 레이저를, 특히 그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던 걸 떠올렸다. 그녀는 인간의 미적 관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조금, 하인들이 그토록 말하던 레이저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곤 손끝으로 살짝 베일을 잡아당겼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들킬까봐.
“선생님, 그 말은 그러니까, 제가 앞으로도 대역을 맡을 자격이 있다는 건가요?”
레이저의 웃음이 살짝 가셨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라고.”
“선생님…….”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조금이지만 용기가 샘솟았다.
“제 말이 틀렸다면 말해주시겠어요……? 혹시 선생님은 제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일부러 엄하게 대하셨던 건가요?”
“아니, 엄격하게 대했던 건 내 성격 때문이지, 널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니다. 대역을 잘 해내지 못하리라고 봤던 것도, 종합적인 훈련 성과를 보고 내린 결론일 뿐이다.”
“그래요, 그랬군요…….”
“하지만, 어쩌면 넌 궁지에 몰렸을 때야 비로소 성장하는 부류일지도 모르지.”
레이저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마치 기억을 더듬듯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 전 활약 말고도, 다시 생각해보면 지난번 암살자들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바로 네가 가진 특성일지도 모르지.”
“특성이요?”
레이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소녀는 늘 레이저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은 초조해했고, 간혹 불같이 화를 냈으며, 어쩔 땐……자신의 추측이 맞는지는 몰랐지만, 레이저는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면 늘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았다. 늘 경계를 멈추지 않은 탓에 바짝 굳어 있던 어깨는 긴장이 풀렸고,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두 눈은 자신을 응시했다. 마치 깊은 상념에 빠져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오직 그럴 때만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부드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그럴 때면 레이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눈빛이 그녀에게 어딘가 익숙하고 친근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들이 예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따뜻함은, 과연 자신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다이애나 아가씨를 향한 것일까.
소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소녀가 확실히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