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동시에 소녀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샤킬과 가신이 나눴던 말 때문이었다.
마치 샤킬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어서 소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샤킬이 소녀를 납치한 것은 맞았지만, 그가 이 계획의 주모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가 협상하고 있는 상대는 누구일까? 또 누가 그에게 협상을 하라고 지시를 한 걸까? 소녀는 이번 납치 사건이 한 가문만 관여한 일이 아닐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지만, 대화를 듣고 나니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소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들을 나열해봤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정보가 너무 적었다. 손가락을 아프도록 깨물며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깜짝 놀란 소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창문을 휙 돌아봤다. 바깥에서 천천히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게 연기에서 나는 냄새였다고 의식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지키고 서 있던 자들이 소란을 피웠다.
“산불인가?”
“아닌 것 같아, 공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소녀는 창가 곁으로 다가갔지만 어두컴컴해진 바깥에선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불길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하얀 연기로 가득 찼다. 불길은 엄청난 속도로 번져갔고,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그들을 향해 불어왔다. 소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수흐 가의 전사 한 무리가 소녀를 껴안았다. 그녀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들은 소녀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소녀는 수흐 가문 역시 이 불길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주님은 어디 계시지?”
무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남쪽이다ㅡ!”
목이 아플 정도로 매캐한 연기가 그들 주위를 감쌌다. 전사들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들은 소녀를 안은 채로 가주를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누군가 건물들 사이의 어두운 샛길에서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소녀 곁에 서 있던 두 도마뱀은 끄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흘렸다. 소녀가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자가 그녀를 끌어당겨 어둠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몇몇이 뒤늦게 그들을 뒤쫓으려고 했다. 소녀가 꼬리를 휘둘렀다. 뒤쫓는 자들의 두 다리를 힘껏 쳐서 쓰러뜨린 뒤, 소녀는 그자를 따라 멀리 도망쳤다.
그들은 화재 현장을 우회하여 뜨거운 불길을 피해 산비탈로 향했다. 공기의 온도가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흐 가문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지금껏 급박한 상황에 정신없었던 소녀는, 그제야 격한 기쁨이 물밀 듯이 찾아왔다. 그자의 뒷모습이 이제야 똑똑히 보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은회색 머리칼이 어둑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레이저였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산에 도착한 지금도 산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곳곳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광경은 무척이나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산불 따위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두 손으로 꽉 붙잡은 레이저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구조됐다. 살아남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