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말은, 그러니까, 가주님께서……제가 떠나길 바라셨던 건가요?”
소녀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억지로 웃음을 지은 소녀가 천천히 말했다.
“제가 납치당해 버려서, 가주님을 귀찮게 만들어 버려서……선생님 보고 이런 식으로 절 버리려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랑 같이 떠나면 그만ㅡ”
레이저가 다시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피할 뿐이었다.
“제발 기다려주세요, 전 아직 쓸모가 있을 거예요……다시 돌아가면, 절대로 가주님께 민폐 끼치지 않을게요. 선생님, 제발 다이애나 아가씨의 대역임무를 계속하게 해주세요.”
소녀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말이 레이저의 귓가에 분명히 닿길 바랐다.
“너, 너 제정신이냐?”
레이저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분노한 채 눈을 부라렸다. 소녀의 고지식한 모습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듯했다.
“후안 가문은 제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곳이었어요. 그리고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보답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해요. 특히 다이애나 아가씨는……유일하게 그분은, 제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분이에요. 선생님, 절 어디로 데려가주실지 말씀해주실 수 없다면……전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어요. 왜냐면 전 진심으로 후안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싶으니까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3호?”
레이저가 격하게 반응했다. 겨우 용기를 내서, 소녀를 데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소녀는 반대로 다시 돌아가 죽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왜 그렇게 후안 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 하는 거냐?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냐? 직설적으로 ‘나와 함께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자’고 말해야 알아들을 심산이냐?”
소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멍한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도피’요? 설마 사랑의 도피를 말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럼 왕위 쟁탈전이 두려우신 건가요?”
“아니라고!”
그러니까 후안 가는 날 해고한 적이 없고……이게 모두 선생님의 뜻이란 말이야?
소녀는 숨을 헐떡였다. 도저히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이애나를 비웃던 샤킬의 의문이 마치 진짜가 된 것만 같았다. 소녀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레이저의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모양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네요. 당신은 후안 가를 배신할 생각이군요.”
“……하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어쩌면 이번이 레이저가 처음으로 소녀의 반문에 입을 다문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든 채 깊이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소녀를 등진 채로 한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고뇌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선생님이 절 왕위쟁탈전에서 빼내려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레이저의 안색이 변했다. 소녀는 더욱 의심을 품었다.
눈앞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ㅡ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를 따라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때 레이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전쟁포로였던 자신과, 갓 알을 깨고 나온 소녀……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솔직하게 소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후안 가문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아니라고. 소녀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은 소녀를 신경쓰고 있었노라고.
하지만 레이저도 알고 있었다. 이건 고작 한두 마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말한다 할지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불과할 뿐이었다. 레이저 스스로도 자신의 이런 감정이 과연 사랑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소녀가 살아있는 걸 본 순간 들었던 격렬한 감정이 그가 더 이상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자신의 결정을 소녀에게 강요했던 것일지도.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서도 소녀를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