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는 도마뱀 일족이 이렇게 입을 다물 때마다 진절머리가 났다. 대체 어떻게 해야 가주 부부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지금 당장 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후안 가를 박차고 떠나, 유괴범들을 모조리 도륙한 뒤 소녀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그깟 왕위계승전 따위가 뭐라고, 왜 아직도 내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시장에 내놓던 물품들을 줄이는 척하죠.
잉겐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톱으로 크무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리가 돈줄을 ‘정리’할 이유가 필요한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외부에선 우리가 다이애나를 되찾으려고 돈을 마련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레이저가 뒷조사를 할 시간도 생기겠죠.“
“호오.”
무표정을 유지하던 크무트의 얼굴에 화색이 비쳤다.
“그럴듯하오, 부인.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레이저. 그 편지는 자네가 보관하고 있게. 자네가 저택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의심을 살 테니, 나가서 최대한 정보를 캐내도록 하게. 무슨 짓이든 다 용인하겠네.”
“알겠습니다.”
레이저는 방을 나섰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잠식한지 오래였다. 순간 잉겐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레이저는 자신의 손패를 뒤집어 까버리고 아예 호위 임무를 포기하겠다고 나섰을지도 몰랐다.
부부에겐 소녀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지만 레이저는 달랐다. 그는 다름 아닌 소녀를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만일 소녀를 잃어버린다면, 고통과 투쟁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레이저는 후안 가문을 비롯한 다른 왕위 후보자들이 피바다 속에 죽어 나자빠져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걸로도 부족했다. 이 역겨운 왕국은, 아니 이 모든 세상은, 분노의 들불에 완전히 불타올라 자신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게 나았다. ㅡ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이상, 희망이 가득 찬 낙원 따윈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레이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하마터면 자신이 이 세상을 증오해왔던 기분을 잊어버릴 뻔한 게 아닌가.
“레이저 씨……레이저 씨.”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 곁에 시녀장이 다가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녀장은 흉흉한 살기를 내뿜던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차분하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읊었다.
“방은 최대한 원래 상태로 보존해놓았어요. 레이저 씨가 둘러본 뒤에 정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가보시겠어요?”
“……바로 가지.”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내저으며 할리파 가의 가주가 죽었던 그 방으로 향했다.
소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할리파 가문의 가신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였다.
당시 레이저는 다이애나 곁에 머물며 간호 중이었다. 잠시 자리를 떠났던 것도 그녀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시녀장은 손님 접대와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방을 맡아 처리하느라 바빴다. 가주 부부는 소녀에게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몇 시간도 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도 소녀의 행방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시녀장도 가주 부부도 소녀가 대역 임무를 게을리 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던 것이었다.
“당시 할리파 가주의 상태는 어땠지?”
“가주의 병세는 꽤 안정된 상태였지만, 방안에서 갑자기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하더군요. 가주 외에도 가신 몇몇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자들이 그 시체를 모두 챙겨 떠났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레이저는 도마뱀 일족의 풍습에 이미 익숙했다. 왕족 가문에서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패배한 가문의 가신들은 곧장 내분을 일으키고, 심지어 모시던 가주를 죽이고 다른 가문에 투신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도마뱀 일족은 패배자들끼리 무슨 난리를 피워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바로 그 기이한 풍습 덕분에 유괴범들은 후안 가주에게 발각되기도 전에 소녀를 납치해 유유히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