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하는 거겠지…….”
“저는 원래 전쟁포로였어요. 단순한 잡일이나 하고 살았죠. 그러다 의술 능력이 눈에 띄어서 길거리를 전전하던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됐죠. 벌써 후안 가문에서 일한지도 10년째네요. 이곳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시녀가 됐죠.”
시녀장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선 자랑도, 슬픔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서 일하는 시종들은 대부분 인간이에요. 게다가 당신이 오기 전까지 당신처럼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없었죠. 자, 저희들이 당신을 어떻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는 자신도 생포되어 포로가 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곧 혐오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을 억죄어오는 족쇄 같은 기억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래, 무척이나 궁금하군. 그런데 당신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시녀장의 권한이죠.”
그녀의 눈빛이 교활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시녀장의 직책은 저택을 관리하는 거구요.”
다시 말해, 어린 인간 시녀들을 휘어잡으려면, 그리고 그녀들이 시녀장이 바라는 대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선, 그녀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손에 넣어 도구로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몰랐지만, 그를 설득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레이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맨손으로 태양왕국으로부터 등 떠밀리듯 전장에 나선 것부터? 전쟁포로가 되어 경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이야기부터? 아니면 제 발로 도마뱀 일족의 전사가 되어 태양왕국으로 돌아가 수많은 인간 동포를 학살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ㅡ하나같이 입 밖으로 꺼낼 법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은 영광스럽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쳐 와야 했던 평범한 일상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운명의 장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살아남으려 발버둥쳐봤자 다시 전장으로 끌려갈 뿐이었고, 차라리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해도 매번 죽음의 운명에서 빗겨나갈 뿐이었다. 마치 그의 인생에는 어떤 아득한 힘이 있어서 어둠의 주위를 계속 맴돌도록 그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일 자신이 피비린내 속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빛 한 줄기 정도는 허락해주기를. 자신의 고통에 둔감해진 것이라도 괜찮았다. 아직도 희망이 있으리라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도 괜찮았다. 그깟 감정 따위는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운명이 자신을 추악하고 비천한 자로 만들어버린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는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난 그저 평범한 미치광이일 뿐이야.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겠나.”
결국,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치광이에 ‘평범한’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까요?”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미친 듯이 집착한다 할지라도 이상할 게 없지.”
레이저는 침대 곁에 섰다. 소녀 역시 이곳에 서 있었으리라 상상했다. 손을 뻗어봤지만 그는 그 생명의 빛을 움켜쥘 수 없었다. 그해, 소녀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따스한 기억마저 조금씩 좀먹어가고 있었다. 레이저는 소녀가 사라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그의 이성도 조금씩 무너져갔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거죠?”
시녀장은 살짝 주저하며 물어왔다.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다.”
레이저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엔 레이저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연약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