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먹다 남은 뼈로 단단한 땅을 파헤쳤다.
그게 쓸데없는 일이라는 건 소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버둥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래서 소녀는 어쩔 땐 고의로 살려달라고 소리치기도 했고, 또 어쩔 땐 땅을 파내는 시늉을 하며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납치된 지 이제 이틀째였다. 철창은 가끔씩 수흐 가의 행렬을 따라 이동했다. 수흐 가의 영지는 후안 가문과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지는 무척이나 척박한 곳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고 마을을 계속 옮겨 다니는데 익숙했다.
소녀는 시녀장의 수업을 떠올렸다. 수흐 가문은 외부로 나갈 때 늘 주천막을 대동하고, 동시에 수많은 소천막들이 뒤따른다. 귀환 도중 수흐의 가주는 행렬을 몇 개로 나눠 이동하며, 이때 나눠진 행렬들은 각각 소천막들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만에 하나 후안 가에서 수흐 가가 범인인 걸 알아차린다 할지라도, 분명 주천막이라는 미끼를 뒤쫓을 터였다.
소녀의 머릿속에 레이저의 변덕스러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소녀는 다이애나 행세를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키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가주 부부는 계속해서 지금 같은 상황을 유지하려고 할 터였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레이저를 보내 그녀를 찾던가, 혹은 소녀가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두고 소녀가 샤킬의 손에 처리되면, 그제야 후안 가가 다른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소녀는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이군, 다이애나.”
철창을 가리던 천이 거칠게 젖혀지자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녀의 더러워진 두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꺅!”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철창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 몸을 웅크렸다. 연기를 위해 일부러 취한 행동이었다.
천을 움켜쥐고 있던 수흐 가주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땅이나 간지럽히고 있어봤자 소용없소, 아가씨.”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녀는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그는 기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대꾸하진 않았다. 소녀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아버님께서 답장하셨나요?”
소녀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떨 것 같나? 아가씨는 아버지에게 아주 중요한 꼭두각시인데 아가씨를 버릴 수도 있단 말인가?”
그 말은 소녀의 마음을 후벼 파는 듯했다. 다이애나 본인이 아닌데도 그러했는데, 다이애나가 그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
“별 일 아니면 다시 철장을 가려주시죠. 당신과는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얕은 수로 도발해봤자 소용없으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이나 해보게. 물론, 계속 땅이나 긁어주고 있어도 괜찮겠지. 땅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구멍이라도 열어줄 줄 누가 알겠나? 그 길로 도망쳐보라고.”
“저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가요?”
“그럼 적어도 이 지루한 여행길이 빨리 지나가지 않겠나, 아가씨도 동의하지?”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저 도마뱀 일족이 이토록 한가로운 척이나 하고 있는 건지, 왜 인질을 친구처럼 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녀는 두 손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우아한 자세로 앉았다. 비록 창살 속에 갇혀 있는 신세라도 소녀는 눈앞에 있는 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