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님, 흥을 깨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가주님의 말소리에 바깥에 있는 자들이 놀랄지도 모릅니다.”

“아차……까먹을 뻔했구먼.”

샤킬은 배를 움켜쥐고는 웃음을 삼켰다. 그는 다시 한 번 소녀의 팔뚝을 콱 움켜잡더니, 친근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여행이 되겠군, 다이애나. 밤에 다시 찾아오겠네.”

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소녀의 손등 위에 키스했다.

“꺄악ㅡ!”

소녀는 역겹다는 듯 소리쳤지만, 그 비명소리에 샤킬은 더더욱 크게 웃었다. 마치 소녀가 그렇게 반항하길 바란 것 같기도 했다.

샤킬은 가신과 함께 천막을 떠났다. 한참을 고래고래 악을 지르던 소녀는 바깥에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된 뒤에야 크게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샤킬처럼 낯짝 두꺼운 자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피곤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그녀의 진짜 모습을 몇 번이고 드러낼 뻔했다. 샤킬이 눈치채지 못했길 빌 수밖에 없었다.

샤킬의 태도는 무척이나 얄미웠다. 유괴범이란 자가 어떻게 그렇게 여유만만할 수 있단 말인가. 천성적으로 간덩이가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되는 모양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샤킬의 행동이 소녀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소녀는 장갑과 팔찌를 벗었다. 기형적으로 수축된 손가락에서 마치 바늘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발톱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철장에 바짝 달라붙었다. 두세 번 손톱을 휘젓자 간단한 구조로 된 자물쇠가 달칵 열렸다. 왕실의 아가씨가 이런 잡기술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해봤겠지. 그녀도 길거리에서 배웠던 이 기술이 지금 같은 때에 도움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소녀는 천천히 철창을 열어젖힌 뒤 최대한 조용하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천막 입구를 슬쩍 들추곤 바깥 상황을 몰래 살폈다.

주변을 둘러본 결과, 이곳은 아직도 오아시스 근처인 것 같았다. 식물들이 드문드문 땅을 덮고 있었고, 곳곳에 물레 몇 대와 염료 항아리, 그리고 햇살에 널어 말리고 있는 털실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론 간이로 지은 듯한 공방이 있었는데, 귀를 쫑긋 기울여보니 여공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짐작하건데 대부분 도마뱀 일족이었고, 인간들도 조금이지만 있었다. 주변엔 몇 개의 작은 천막들이 놓여 있었고, 그 사이를 도마뱀 일족들이 오가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수흐 가의 가신과 호위병들인 것 같았다.

수흐 가문은 아마도 어딘가에 위치한 방직 공방 혹은 양모처리 공방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규모는 달라도, 왕국에선 어딜 가나 카펫 제작공방이 존재했기에 이곳이 어디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도망치다가 붙잡혀 진짜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그건 후안 가문에게 전혀 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깥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역대는 도마뱀 일족보다 훨씬 넓었다. 그걸 이용해 레이저는 그녀에게 한 가지 소통 방법을 가르쳤는데, 도마뱀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크게 암구어를 외치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에겐 어떤 의미도 없는 고함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녀는 끌려오는 길에 계속 이렇게 행동해왔다. 이동 중인 길목 위에 표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레이저가 나타나리란 기대 따윈 하지 않았다. 자신이 구조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죽는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기 전이라면, 좀 더 발버둥 쳐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소녀는 다시 철창 안으로 기어들어간 뒤,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잠갔다. 그리고 구석에 기대 무릎을 끌어안았다. 꼬리도 몸을 보호하듯 팽팽하게 감쌌다. 소녀는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넌 궁지에 몰렸을 때야 비로소 성장하는 부류일지도 모르지.’

레이저가 자신의 장점을 잘못 보지 않았길 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