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그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샤킬은 놀랍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더니, 곧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떠보려 들다니, 정말 용감하군.”
소녀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이젠 소녀도 샤킬이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길목 위에 흔적을 남겼다는 걸 알고 있었고, 후안 가의 용병들이 멀리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라는 것도, 정해진 시간마다 레이저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샤킬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목적은 두 가문에 혼란을 빚는 것뿐인가요? 그저 동시에 우리 둘을 약화시키려는 거라면, 제가 죽든 말든 몸값으로 저희와 시드니 측의 재력을 줄이는 덴 충분했겠군요.”
샤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내 동료는 아가씨가 말했던 부분은 신경쓰지 않더군.”
그는 망설이면서도 입을 열었다.
“나는 전사이긴 하지만, 아가씨가 생각했던 것처럼 숭고하진 못해……사막왕국은 이미 변했어. 어떤 것은 피와 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실제적이지. 우둔한 나조차도 그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왕위쟁탈전을 부정하고 있는 건가요?”
“왕위쟁탈전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그저 싸움이나 살육과 관련된 일일 뿐이었다면, 나는 분명 후안 가 측에 섰을 거야. 하지만, 내 동료는 내게 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해줬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그 자는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죠?”
질문하던 소녀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샤킬이 돌연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가벼운 말투였기에 오히려 더욱 무정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자가 누군지 말해줄 순 없지만, 그가 바라는 건 이 나라의 파멸이라고 해두지.”
“헛소리!”
이번엔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두려워하면서 그의 말에 반박했다.
“헛소리가 아냐. 이대로 가다간 왕위쟁탈전은 이 나라를 자멸의 길로 몰고 갈 거다. 이미 많은 자들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지. 너희들 후안 가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텐데. 혼자 고결한 척 해봤자 소용없어.”
소녀는 표독스럽게 두 눈을 부릅떴다. 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을,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길바닥에 엎드려 누군가가 베풀 동전이나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그저 살아남기 급급한 인생이었다. 하루 배불리 먹고 안전히 잠에 드는 걸 바랄 뿐, 꿈도 미래도 없으며, 무언가를 배울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의 부를 독차지한 자들은 이제 이 땅을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대체 왜? 그녀는 당장이라도 고함치고 싶었다. 당신들은 대체 왜?
“그래요, 백성들은 영원히 배고프고 굶주려야 하고, 법률은 힘을 숭상하면서 모든 것 위에 군림하려 드는데, 모든 자원은 귀족들과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으니 당연히 왕국을 떠날 여유 정도야 충분하겠죠. 샤킬, 당신의 말이 희생당해온 사람들의 귀에 얼마나 웃기게 들리는 줄 알아요!?”
소녀는 분노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아가씨도 왕위쟁탈전에 참가하지 말았어야지.”
“그렇기 때문에 제가 왕위쟁탈전에 참가한 거예요. 이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 저는 다른 누군가의 시체를 밟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당신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요!”
샤킬은 소녀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건 동정 같기도 했고, 칭찬 같기도 했다.
“아가씨 말이 맞아.”
샤킬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손톱이 머리칼을 쓸어내렸고, 귓가 근처를 간지럽혔다.
“만약 아가씨의 생각을 일찍 접했다면, 나도 다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지……아가씨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을지도.”
“샤킬, 그만해요.”
소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는 얌전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일 오후, 시드니 측과 오아시스 서남쪽에서 교섭을 진행할 거다. 그곳엔 야생 물열매나무숲이 있는데……왕족의 아가씨가 죽을 곳으론 적합하진 않지, 안 그래? 아직 하룻밤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내 제안에 대해 고려해보라고. 잘 있게.”
그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천막을 떠났다.
소녀는 생각했다.
왕위계승자 중 하나인 시드니는 연회가 열리기 전 다이애나의 목숨값에 대해 샤킬과 논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시드니가 사려고 했던 것은 살아 있는 인질이 아니라 죽은 시신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했다.
그 말은 아직 배후엔 또 다른 흑막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자가 바로 샤킬이 말했던 ‘동료’일 테고.
‘동료’는 시드니를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샤킬이 다이애나를 납치한 것에 대한 오명과 위험을 전가시키기 위해서. 그러나 그 자의 진짜 정체에 대해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도 이젠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들은 상태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소녀는 바닥에 앉았다. 당장 누군가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기력을 다해 암구호를 외쳤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멀리서 희미하게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계속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후안 가가 내 목숨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저 얌전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일까?’
모든 게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샤킬의 진심도, 돌변한 레이저의 태도도, 심지어 자신과 다이애나의 생각도ㅡ대체 뭐가 옳은 걸까? 어떤 것이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녀는 지금 다이애나를 연기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이애나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 내가 했던 일들이 맞았다고 말해줬으면. 그 모든 것들이 중요했다고 말해줬으면.
소녀는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소녀는 더 이상 생각하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