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소녀가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레이저는 그저 앞으로 걸어가면서 소녀를 등진 채 입을 열었다.
“뭘 더 알고 싶은 거냐?”
소녀는 멈칫하다, 겨우 발을 내딛으며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어떻게 배후에 일프가 있다는 걸 알아냈죠?”
“시장에서 떠도는 소문들을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지. 네가 납치된 뒤에 활발하게 움직였던 유력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시드니를 용의선상에서 빼놓고 나면 일프 뿐이다. 원래는 8할 정도 확신했었지만 샤킬의 반응이 내 추측이 정답이라는 걸 말해줬지.”
소녀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프는 어째서 시드니를 배반한 걸까요…….”
“왕위 쟁탈전을 틈타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겠지. 그건 확실해. 샤킬도 그저 일프의 수하일 뿐이니까.”
“샤킬, 그 사람도 말한 적이 있어요. ‘이 나라는 곧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말이에요. 일프는 더욱 무시무시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샤킬이 죽었다고 해서 멈출 리가 없어요.”
소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샤킬이 이전에 꺼냈던 말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왕위 쟁탈전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단 말이냐?”
레이저가 피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확실해요. 그자는 분명 일을 저지르고 말 거예요.”
소녀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레이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내 말을 삼켰다. 소녀는 그의 사소한 반응을 눈여겨보며 경계심을 더욱 키웠다. 레이저에 대한 의심은 거의 확신에 다다를 정도였다. 레이저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샤킬을 죽인 순간부터 그는 줄곧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그자가 왕위 쟁탈전을 망쳐버리려 든다면, 네가 계속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소녀는 어색하게 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마치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자의 계획이 왕국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해도요?”
소녀가 추궁하듯 물었다.
“바보같은 말이로군. 국가가 생겨난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레이저의 답변에 소녀는 깜짝 놀라 묻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잠깐만요, 그럼 선생님은 왕국의 미래 따윈 알 바가 아니란……”
“그래. 신경 안 써.”
“선생님이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인간들을 죽여왔잖아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국가나 명예 같은 건 내게 있어선 개소리나 마찬가지다.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질러왔던 것뿐이야.”
“선생님은……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던 건가요?”
소녀는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늘 그랬지.”
그는 소녀를 곁눈질했다.
“네가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뿐.”
옛 기억을 찬찬히 떠올려본 그녀는 자신이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껏 선생님에게 그런 생각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어떤 과거를 갖고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레이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만 봤을 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예전의 나는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진작 물어봤더라면, 어쩌면 좀 더 일찍, 레이저는 소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눈빛은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회의감과 혐오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건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그가 꺼내는 한 마디 말도 모두 날카로운 칼처럼 듣는 이에게 반드시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예전의 자신은 어째서 그런 점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