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래도 일프가 저지를 일들은 어떡하구요?”

“그자가 무슨 짓을 벌여도 이미 너와는 무관한 일이다. 넌 그저 대역이라는 직분에만 충실하면 될 뿐이야.”

레이저는 사색이 잠긴 것처럼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엔 아주 좋은 솜씨였다. 어쩌면 당분간 널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전투 훈련을 그만하시겠다는 건가요?”

레이저의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찾아내려는 듯 소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림자 호위병이 익혀야 할 것은 전투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난 앞으로도 조사해야 할 게 남아 있다.”

“가주님께서 허락하실까요?”

“그럴 거다. 나라면 그분들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레이저의 말은 긍정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가주 부부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자랑 같지도 않았다. 그저 소녀의 눈길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적들의 의도가 이토록 확실한데도, 레이저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수업을 듣지 말라고 말하다니.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불합리한 일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이저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녀는 기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소녀는 레이저에게서 분명히 대답을 들었지만, 그건 오히려 더욱 큰 의혹만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질문들은 전혀 핵심을 건들지 못했다. 만약 계속 납치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맴돈다면 레이저가 어째서 자신을 왕위 쟁탈전에서 빼내려 하는 것인지, 결국 그 진정한 의도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소녀는 화제를 바꿔서 레이저를 떠보기로 했다.

“선생님.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또 뭔데? 오늘은 질문이 정말 많군…..”

“만약 지금 선생님과 함께 여길 떠난다면, 왕위 쟁탈전을 포기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레이저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레이저는 뒤돌아 소녀를 바라봤다. 방금 전처럼 냉랭하게 비웃던 얼굴이 아니라 진짜로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소녀를 데리고 떠나려던 그날처럼.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햇살 때문에 그의 얼굴에 비치는 미묘한 감정마저 소녀가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날 놀리는 거냐?”

레이저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 드문 노기가 그의 얼굴에 서렸다.

“아니요. 그날 밤 일은 이미 잊었어요. 지금은……혹시나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떨까 묻는 것뿐이에요.

소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ㅡ제기랄.”

그는 곧장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화를 삭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자칫 욕설을 내뱉을 뻔한 자신을 자책하는 듯했다.

“난……후,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날 의심하든, 아니면 믿지 않든, 그건 네 사정이다. 그런다고 내가 하는 일이 변하진 않는다.”

“그렇게 말한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3호. 이해할 필요는 없다.”

“전 3호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다이애나도 아니지.”

“어째서요? 이름은 바꾸면 되죠. 그저 아가씨와 이름이 똑같을 뿐인 거예요.”

“내게 있어서 넌 그저 너일 뿐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이애나’가 되고 싶은 게 아니잖아.”

간파당했어.

소녀는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레이저는 늘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부분의 정곡을 찔렀다. 지금까진 그게 레이저의 통찰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자가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