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 표정을 본 레이저의 마음이 또 다시 흔들렸다.
그는 소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녀에게 있는 그대로 모든 사건의 전말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의 과오를, 그의 걱정을, 그의 기대를……소녀를 만난 날부터, 그 모든 것들을 꺼내놓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입가를 맴돌다 다시 삼켜버려야 했다.
어쩌면 두려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한번 진실을 밝히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지켜내고자 했던 “정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그는 진정한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도 몰랐다. 소녀에게 이해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자기 스스로도 도저히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레이저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소녀가 실망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나았다.
“지금 당장 항구로 떠난다면, “푸른 이파리 호”라는 상선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선장은 국경지대의 마을 근처로 데려다줄 거야. 무척이나 외진 곳이라 후안 가문 측에서도 널 찾을 수 없을 것이고, 너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다시 길거리를 전전하는 생활로 돌아갈 걱정은 하지 마라.”
레이저는 소녀의 우울한 감정을 애써 무시한 채, 조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물어보마. 정말로 후안 가문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냐? 언제 암살당할지도 모르고, 가주님에게 희생양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는 걸 바란단 말이냐?”
레이저의 물음에 소녀는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땅을 딛고 선 두 다리가 마치 허공을 거니는 듯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대답일까? 레이저는 제대로 이유를 설명해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 같진 않았다.
눈앞의 남자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던 소녀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이미지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의 뒷모습은 마음속 유일한 닻이 되어,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마지막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맞아요.”
소녀는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래야만 네가 진정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레이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님도 가주님께 제 과거에 대해 들으셨죠? 전 어렸을 때부터 길거리를 떠돌았어요. 아무것도 없던 제게, 그분들은 모든 것을 주셨죠…….”
“그건 알고 있다.”
레이저는 귀찮은 듯 소녀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만약, 내가 그분들이 네게 주지 못했던 걸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선생님은 제가 뭘 바라는지 아시겠어요?”
레이저는 카지노의 도마뱀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갖은 굴레에 얽매여 나날이 영혼을 잃어가던 그 슬픈 눈동자를 떠올렸다.
“예컨대 자유, 존엄, 혹은……”
레이저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곤 팔짱을 끼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
“사랑……같은 것들.”
그녀는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