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레이저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레이저가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면서 레이저가 자신을 만지지 못하도록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쯧, 눈치가 빠르군.”
레이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거죠!”
소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치며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헛소리는 그만해라. 나를 피하고 싶으면, 그 정도 떨어진 걸론 부족할 텐데.”
“으윽! 후안 가문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절대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소녀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계속 뒷걸음질쳤다.
“어째서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죠? 전 절대 후안 가를 떠날 생각이 없어요. 제 자신의 운명도 잘 알고 있다구요!”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상관없다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녀가 소리쳤다. 레이저를 향해 미묘한 태도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완전히 적으로 바라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은 이미 저와 후안 가의 적이에요!”
소녀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자, 남자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소녀의 위협 따윈 신경쓸 가치도 없다는 듯.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무척이나 확실했다. 그 광기어린 결의를 순식간에 이해한 소녀는 남자의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소녀는 오한이 들었다. 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레이저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녀의 목덜미를 후려치려고 했다. 순간 소녀는 레이저가 그 일격으로 자신을 기절시키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서 배운 몸동작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녀는 팔을 들어 레이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일격을 막아낸 뼈가 얼얼하게 시려왔다. 남자는 서슬푸른 눈빛으로 소녀를 노려보면서, 이번엔 소녀의 급소 대신 몸통을 노렸다. 그 행동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저항할 것이라면 자신이 폭력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에 불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소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레이저!” 소녀는 전력을 다해 레이저의 일격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전투 훈련에서 단 한 번도 그를 이긴 적이 없었다.
“제 말을 들어봐요!”
소녀가 목청껏 소리쳐 봐도 소용없었다. 레이저는 전혀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종아리를 걷어차인 소녀는 순간 밀려오는 고통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 순간 뇌리에 레이저가 시도 때도 없이 말했던 충고가 스쳐지나갔다.
‘절대 무릎을 꿇지 마라. 빈틈을 드러내는 꼴이니까.’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대신 무게중심을 힘껏 뒤로 끌어당기면서 쓰러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레이저의 예상대로였다. 그는 소녀가 균형을 잃은 틈을 타 어깨를 밀치면서 땅에 처박고 전력을 다해 짓눌렀다.
소녀는 밀려드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레이저의 그림자가 소녀의 몸 위로 드리우며 햇살을 가렸다.
가면 아래 가려진 눈빛이 상처보다도 더욱 소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힘껏 무기를 꺼내 자신의 가슴에 겨누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을 역으로 이용해 대담한 척 행동했다.
“레이저, 계속할 거라면 여기서 목숨을 끊어버릴 거예요.”
그녀는 레이저의 광기어린 두 눈을 피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그를 직시했다.
“날 아가씨에게서 말도 없이 떼어놓을 생각이라면, 적어도 제 목숨으로 책무를 다하고 말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