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는 눈을 살짝 치켜떴다.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그는 무척이나 차분해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소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있나?”
그는 그르렁거렸지만, 결국 그토록 무력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따르는 것보단 나아요.”
소녀는 마음을 다잡고 레이저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레이저는 더 이상 소녀의 스승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가문을 노리는 위협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당신이 제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전 당신이라는 사람을 더는 믿을 수 없어요. 만일 또 다시 절 데려가려고 한다면, 제 시체를 대신 가져가야 할 거예요.”
생각지도 못했던 그 말이 남자에게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저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할지라도, 레이저는 소녀의 협박에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소녀를 떼어두고 일어섰다, 그는 고뇌에 가득 찬 무거운 눈빛을 흘리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망토를 휘날리며 소녀를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그는 그런 말 한 마디와 함께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게 내 잘못이라고?’
소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거리를 두고 그를 뒤따라 걸었다.
이젠 레이저가 자신을 데려가려는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바람을 무시하려고 든다면 샤킬과 다를 바가 뭐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레이저를 향한 마지막 신뢰와 존경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남은 거라곤 적의 어린 경계심뿐이었다.
그녀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레이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런 생각들은 연약하고 의존적이었던 마음을 떨쳐내 버리곤, 단단하게 무장된 심리적인 벽을 만들어냈다.
침묵을 유지하면서 10분 정도 천천히 걸어갔을까, 저 멀리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용병 무리가 보였다. 머릿수도 무장 상태도 모두 충실해 보이는 부대였기에 소녀는 속으로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 한 사람이 시드니의 시체를 짓밟은 채로 두 사람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친 데는 없으신지요?”
“난 괜찮아. 그건 시드니야?”
소녀는 억지로 기운을 내며 평상시 다이애나의 모습을 따라했다.
“아, 보지 마십시오, 아가씨. 보시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얼굴 부위는 완벽하게 보존해두었습니다.”
용병은 레이저를 돌아보며 말했다.
“레이저. 어떻게 처리할까요?”
“시장 입구에 버려둬라. 그곳엔 시드니를 알아볼 사람들이 있을 테니.”
레이저는 냉정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모두 출발!”
용병은 박수를 치며 재촉하곤, 이내 그중 인력거 한 대를 손짓해 불렀다.
“아가씨,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타시지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의 부축을 받아 수레에 올라탔다. 하지만 레이저는 함께 타지 않고 수레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뒤쪽에서 다른 용병들과 함께 따라왔다. 주변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서일지도, 아니면 다가오지 말라는 소녀의 요구를 들어준 것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힐끔 레이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힌 소녀의 마음은 도무지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녀와 레이저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마치 중간에 거대한 벽이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쩔 땐 소녀가 도무지 손쓸 수 없을 만큼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 같기도 했다.
‘레이저는 자기 입으로 후안 가문에 충성한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
다이애나가 이전에 했던 말이 불현 듯 스쳐지나갔다.
‘어떤 말도 안했다는 건,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리고 소녀는 드디어 깨달았다.
레이저·버나드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그녀가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남자의 진정한 면모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결국 자신이 바라는 결과만을 원할 뿐이며, 그 결과 소녀가 산산이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소녀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