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샤킬이 온몸의 근육을 부풀리며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을 내비쳤다. 그저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는데도 레이저는 엄청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샤킬은 노련한 전사였다. 힘도 스피드도 레이저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게다가 주위엔 몸을 숨길 만한 엄폐물조차 없었다. 레이저는 문득 샤킬과 같은 적수를 상대해본지 무척이나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에도 이처럼 강렬한 죽음의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성혈투기장에서였다. 조잡한 무기 한 자루만으로 각종 괴물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그곳. 거칠고 폭력적인, 무척이나 적나라한 압박감이 엄습해오던 그곳.
그곳에서 빠져나온 이후 레이저는 줄곧 인간들만을 상대해오며 더욱 교묘한 수법들을 익혀왔다. 그건 살아남기 급급해 위험을 회피했던 게 아니었다. 도마뱀 일족들 속에 녹아들기 위해서 남다른 능력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인간이 도마뱀 일족보다 나약한 존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을 테니까.
샤킬의 시미터가 날아들었다.
레이저는 비스듬히 비켜서면서 도마뱀 일족의 힘을 역이용해 칼날의 궤적을 빗겨냈다. 그리고 품속에서 룬 도구를 꺼내 샤킬을 향해 내던졌다. 샤킬의 얼굴 바로 앞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움직임을 방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레이저가 빈틈을 노리고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샤킬의 두꺼운 피부를 뚫을 순 없었다. 고작해야 가벼운 생채기만을 냈을 뿐이었다. 샤킬이 팔을 휘젓자, 레이저는 뒤로 몇 발작 물러서며 몸을 낮춰 자세를 가다듬었다.
“벌레 같은 놈, 귀찮아 죽겠구나!”
샤킬은 폭발 후 공중에 남은 연기를 휘저었다. 그는 이빨을 들이밀며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비열한 수법 따위가 아니면 날 이길 자신도 없단 말이냐!”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당신네들 왕국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지.”
레이저는 칼날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면서 샤킬을 곁눈질했다.
“아니면 뭐지? 이런 벌레 같은 수법에 당하게 돼서 두렵기라도 한 건가?”
“헛소리! 그럴 리가ㅡ”
레이저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또 한 번 룬 도구를 내던졌다.
폭발음에 샤킬이 눈을 질끈 감은 틈을 타 레이저가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샤킬은 무기를 내던지고 레이저의 오른쪽 팔뚝을 콱 움켜쥐었다. 분명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샤킬은 살기를 읽어 그의 동작을 파악한 것이었다. 본능에 가까운 반응에 레이저는 신음을 흘렸다. 샤킬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 레이저를 끌어 잡는 것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젖혔다. 레이저를 바닥에 메다꽂아 팔목을 부러뜨릴 생각인 듯했다.
레이저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지막 남은 룬 도구를 곧장 내던졌다. 샤킬은 눈을 꽉 감았다. 절대 레이저를 놔주지 않을 기세였다. 그 순간 레이저의 오른손 소매에 숨겨진 칼날이 반짝였다. 칼날을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맹렬하게 내찔렀다. 샤킬의 복부에 칼이 박혀 들어갔다. 샤킬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손아귀의 힘을 풀고 말았다.
레이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샤킬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의 손등에 붙여둔 무기는 길쭉한 송곳을 닮은 레이피어였다. 도마뱀 일족의 육체에서 비늘로 가려지지 않는 부위나 얼굴, 목젖을 노리기 위한 무기였다.
샤킬은 그를 노려보면서 지금껏 보여주었던 분노와는 결이 다른 광기에 가까운 살기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