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무기력하게 뒤돌아서자, 다이애나가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침대 옆의 빈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이리 와.”

다이애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는ㅡ”

“쉿. 레이저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다이애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문틈으로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레이저가 멀리 떠난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드디어 떠났네. 솔직히 말해봐. 너, 그 인간을 어떻게 생각해?”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는 천천히 아가씨 옆에 앉았다.

‘아가씨가 내 진의를 알아차리신 걸까?’

“예전에도 말했지? 레이저가 의심스럽다면 나한테 곧바로 보고하라고 했잖아.”

이번엔 다이애나가 정말로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에도 뭔가 말하려고 했던 거 아냐?”

“아가씨가 알아차리실 줄은 몰랐어요.”

소녀는 더더욱 놀란 얼굴로 말했다.

“넌 내 대역이니까. 나도 당연히 널 잘 알고 있지 않겠어?”

다이애나는 갑자기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입가의 송곳니를 매만졌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레이저에게 손패를 모두 내보일 줄은 몰랐지. 바보도 아니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조급했어요.”

소녀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손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더니 머리도 영 좋지 않았구나. 한방에 보내버릴 증거가 없다면 당연히 자중해야 되는 거 아냐?”

다이애나는 다시 방문을 노려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양탄자 위를 걸었다. 그녀의 꼬리가 초조한 듯 가볍게 바닥을 내려쳤다.

“그러니까, 원래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거야?”

“샤킬과 일프의 계획엔, 납치 사건 이외에도 더욱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게다가 레이저도 그 계획에 참여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아직 증거가 없어요.”

“증거는 없지만, 레이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지.”

“네.”

소녀는 그날 레이저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예를 들면 그가 샤킬을 죽일 때 보였던 반응이라던가, 항구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했던 모습, 가주 앞에서 자신의 말을 끊어버렸던 것도. 그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이 일을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 행동들은 무척이나 사소했고, 그런 행동들 때문에 레이저가 후안 가문의 배신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레이저가 무언가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갑자기 왜? 난 네가 레이저를 무척이나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이애나는 소녀를 등지고 섰다.

존경. 그 단어에 소녀의 마음은 갑자기 뒤흔들리고 말았다.

“존경하지 않아요.”

소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엇을 더 숨길 수 있을까.

소녀는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이 꺼낼 말에 스스로 상처를 받으리라는 사실도 무시했다.

“레이저는 제가 그림자 호위병을 그만두길 바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