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들어,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말했다.

“네.”

슬며시 고개를 들자, 그녀의 시선 위로 검은 그림자가 휙 스쳐 지났다. 다이애나가 손을 뻗어 소녀의 뺨을 한 대 때린 것이었다. 어딘가 상냥한 손놀림이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주변이 조용했기 때문에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울렸다. 소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혹여 자신의 행동이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를까 소녀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낼 수밖에 없었다.

“우선, 부모님이 내 이름을 네게 빌려줬다고 해서, 네가 내가 되는 건 아니야.”

다이애나가 차갑게 말했다.

“하인 주제에 그깟 동정심을 보이는 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내가 뭐라고 하소연하든 넌 그저 얌전히 듣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죄, 죄송합니다.”

뺨을 감싼 소녀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다이애나의 붉게 물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어?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그런 고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야. 국가와 관련된 문제도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지 너완 상관없다고.”

다이애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을 뻗어 소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은 내 목숨을 지키는 것뿐이야. 대역 역할이나 잘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알겠어?

“……네.”

“진짜 내 말을 이해했다면, 가서 확실하게 알아내. 레이저와 일프가 관련된 거라면 모두.”

“네?”

확 정신이 든 소녀는 놀란 눈으로 다이애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너한테 뒷조사하는 걸 허락하겠단 말이야.”

다이애나는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똑똑히 알아들으라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너까지 레이저를 의심한다면 그걸 무시할 이유는 없잖아? 내일 하루뿐이라면 시녀장에게 말해서 몰래 외출한 사실을 숨길 수 있으니까. 가서 네 의심을 모두 증명해와.”

“외출을……허락해주시는 건가요?”

“보통 멍청한 게 아니구나, 손 병신. 지금 너한테 바깥에 나가서 조사해오라고 명령하고 있는 거잖아.”

다이애나는 순간 말하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버럭 소리쳤다.

“넌 후안 가의 하인이 아니야. 바로 나, 다이애나의 하인이라고. 우리 부모님도, 시녀장도, 아니면 그 인간도, 네 진짜 주인이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소녀의 가슴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묘한 희열이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해갔다.

다이애나는 소녀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소녀 곁에서 떨어졌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그럴수록 비참해진다고.”

다이애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바닥을 내려치는 꼬리는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짜증스럽게 비췄다.

“난 더 이상……그런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돼 버렸는걸.”

그러나 다이애나의 목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혀버렸고, 소녀는 그녀의 탄식을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