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모두들 윌리엄은 왕궁에서 죽었다고 했던 걸요. 그가 서둘러 귀국한 것에 대해선 온갖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암살당했다는 것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윌리엄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진실이다. 윌리엄·카를로스는 친정을 나서도 여전히 약해빠진 왕이었어.”
레이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국가에 의해 전장에 떠밀려 나갔던 과거를 잊지 못했고, 윌리엄을 향한 분노도 여전했다.
“윌리엄이 죽고……그의 동생이 섭정왕의 자리에 올랐다. 윌리엄의 딸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이토록 긴장 상태에 빠진 건 우리나라를 향한 시어도어 왕의 포악한 태도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수업 때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건 틀렸어. 사막왕국의 선왕 역시 전쟁을 바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레이저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녀의 말을 부정했다.
“물론……시어도어가 전쟁에 미친놈이란 것도 사실이다. 태양왕국이 줄곧 사막에 마수를 뻗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목표 중 하나가 나를 죽이는 것이었을 줄이야.”
소녀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가 당신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건, 윌리엄의 복수 때문인가요?”
“그 냉혈한이 복수는 무슨. 보나마나 민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늉인 게 뻔해.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윌리엄의 죽음은 오히려 그놈을 기쁘게 했을 걸. 권력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은 샤킬의 목적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거군요.”
“아니, 처음엔 그저 의심에 불과했다. 샤킬을 쓰러트리고 난 뒤 나눈 대화로 확신하게 된 거지.”
레이저는 잠시 머뭇거렸다.
“놈들은……너를 차선책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너를 붙잡는데 성공한다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 테지.”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가슴이 욱씬거렸다.
레이저가 말하는 ‘너’는 다른 사람들의 눈엔 ‘다이애나’가 아닌가? 그러니까 샤킬은 레이저를 노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애나로 시선을 돌렸고, 자신들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와 레이저가 무슨 관계인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소녀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듯했다.
만약 모든 것이 레이저가 말했던 대로라면, 지금까지 레이저가 이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두 납득이 갔다.
레이저의 낯설어 보였던 모습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소녀가 무사하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캐묻는다 해도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사실.
“선생님, 저와 선생님은……”
‘저와 당신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거죠?’
소녀는 말하기를 멈췄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레이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레이저가 어째서 이토록 자신을 걱정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레이저의 비통하고도 나약해진 모습을 본 뒤, 소녀는 직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행복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고.
그래서,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사과하고 싶어요.”
소녀는 가볍게 말했다.
“사과?”
“전 선생님을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소녀는 레이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서둘러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전 선생님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저와 후안 가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레이저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어두워졌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고?”
“이제부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선생님을 믿을 거예요.”
소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저를 위해 해주셨던 모든 것에 대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