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는 소녀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였다. 그 손을 잡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전 후안 가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소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제안은 감사해요. 하지만, 그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더라도 저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 제 마음은 영원히 다이애나 아가씨를, 그리고 이번 왕위 쟁탈전을 잊지 못할 테니까요.”

남자는 소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녀의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저에겐 꿈이 있어요. 이 나라를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에요. 선생님, 제발 이해해주세요. 전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코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소녀는 망설임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레이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 탓일까,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았다. 레이저를 상대할 땐 이런 당당한 태도가 알맞을 터였다.

한동안 팽팽하게 대치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역시나 레이저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삭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녀의 손을 잡았다.

“돌아가면 다시 훈련을 시작하자.”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소녀는 기쁘게 웃었다.

“ㅡ네, 선생님.”

레이저를 향한 마지막 의심마저 사그라졌다. 그리고 소녀 자신도 그걸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소녀의 마음은 전에 없을 정도로 맑아졌다. 마치 그들이 항구를 떠나던 순간의 하늘빛처럼.

두 사람은 사막의 대로를 걸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넓었고, 광활한 저녁 밤하늘엔 별들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서늘한 밤바람을 따라 후안 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레이저는 단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았다. 소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손은 언제 어디서든 그토록 따뜻했다는 것을.

레이저의 굳센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손가락 마디 사이에 난 울퉁불퉁한 굳은살과 딱지의 감촉을 느꼈다. 평범한 가족이었다면,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손을 마주잡았을 때 꼭 지금 같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옹알이를 배우던 갓난아기일 때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도, 명절 기간에 열리는 축제의 길거리에서도, 별들마저 어둠에 잠긴 깊은 밤 침대 앞에서도, 아버지의 손은 그 감촉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시큰한 느낌이 코끝을 맴돌았다. 소녀는 레이저가 자신의 생각을 눈치채기 전 곧장 코를 훔쳤다.

소녀는 그 큰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득할 정도로 무한하게 보이는 세상엔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두 사람은 잠시나마 이 세상을 독점한 듯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소녀와 죄업을 짊어진 남자. 세상은 두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곳의 대지만은 조용히 그들을 감싸 안았다. 자신이 죽는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택할 것이다. 남자의 손을 잡은 채 따스함을 잃어버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보다 행복하고 평온한 시기는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왜 우는 거지?”

남자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소녀가 어떤 상태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빨리 말해.”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작게 울먹였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히기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