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금 이 시각, 레이저는 항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금은 선원들이 선적된 물품들을 하역하느라 바쁜 시간도 아니었지만 부두는 여전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그는 건물들을 잇는 아케이드 아래로 움직였다. 항구의 건물들은 무척이나 낡았고 지형도 복잡했다. 끊임없이 늘어선 계단들과 햇살을 가리는 아케이드가 즐비해 자칫했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하지만 동시에 행인들의 시선에 닿지 않는 사각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는 그런 사각들과 높낮이가 제멋대로인 아케이드들을 이용해 몰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뿌리쳤다. 레이저는 소녀가 어떻게 벽을 타고 오르는지 본 적이 있었다.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재빠르게 지붕 위를 넘나드는 소녀는, 겉보기엔 어수룩하고 서툴던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노련했다. 지금 그의 움직임도 소녀에게서 배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저는 일프와 함께 항구의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 당연히, 그와 함께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두운 뒷골목에 숨어서 일프가 사무실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늙은 도마뱀이 지팡이를 짚으며 호위병도 없이 허겁지겁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저는 이전에 일프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가 항구에 인간 용병을 고용해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녀의 행적도 아직 찾지 못했는데 인간 용병도 보이지 않는다니. 레이저는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레이저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프가 항구의 골목길 모퉁이를 도는 순간, 레이저는 따스하게 불어오는 미풍과 함께 소리소문 없이 일프의 등 뒤에 접근했다. 하지만 그의 등에 겨눈 칼날은 그와 정반대로 얼음처럼 차가웠다.
“윽……!”
일프는 딱딱하게 굳은 채 경악에 찬 신음소리를 흘렸다.
“난동부릴 생각 마라, 도마뱀. 찔러죽이기 딱 좋은 키로군. 칼을 움직일 필요도 없겠어. 이렇게 보니 우린 아주 합이 잘 맞겠는걸.”
바람에 실려 온 쇳소리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일프를 천천히 어두운 뒷골목 깊숙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비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목소리였다.
“이러고도 호위병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아가씨를 찾으러 가지 않고 곧장 나한테 먼저 칼을 겨누다니, 순서가 뒤바뀐 게 아닌가?”
“다이애나를 만났단 소리군.”
레이저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 아가씨는 등대 쪽으로 갔어. 지금 당장 가면 뒤쫓을 수 있을 걸.”
일프는 숨을 헐떡였다.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젠체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