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팔런과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세상의 끝자락 같은 이곳 해안절벽 끝엔 낡은 등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등대의 높이는 생각보다 낮아서 대략 도마뱀 일족 6, 7명의 키를 합친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뿐.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보라 소리에 소녀는 덜덜 떨었다. 소녀는 바닷가 근처에 가까이 간 적도 별로 없었고, 바다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서 있는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엔 허름한 난간밖에 없어서,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기라돈 한다면 당장 바닷속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소녀를 긴장시킨 것은 아스라하고도 무시무시한 바다의 광경뿐이 아니라 곁에 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온 건 벌써 한참 전의 일이었다. 후안 가로 돌아가야 할 시간도 지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팔런은 소녀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저 소녀에게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요구했을 뿐 그 외엔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힘껏 난간을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이 있을까? 팔런은 소녀를 포박해 두진 않았지만, 등대 안엔 수많은 인간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곳으로는 갈 수 없었다.
“일프가 이 시각에 바보같이 사무실을 떠나진 않았으면 좋겠군.”
바로 그때, 팔런이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라구요?”
갑자기 정신이 든 소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팔런은 해안가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곳의 해안가는 사람들이 많은 항구와 달리 몸을 숨길만한 엄폐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팔런은 소녀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녀는 다시 물었다.
“당신과 일프가 저를 여러 번이나 납치한 목적이 뭐죠?”
“당신은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니까요.”
남자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녀는 그 말투가 어쩐지 레이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장장 5년 동안 계속되었던 왕위쟁탈전을 떠올렸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왕위쟁탈전의 영향력은 사막왕국에서 그치지 않았고, 태양왕국 역시 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뭔가 요구하거나 조건이라도 제시해야 하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남자의 말은 의외였다.
생각지도 못한 반박을 했다.
“아가씨에게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가씨보다 레이저가 훨씬 더 그럴듯한 교섭가치가 있죠.”
인간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소녀는 찔린 것처럼 아파왔다. 팔런의 말이 다이애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등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그 실루엣에 소녀는 가슴이 옥죄어오는 기분이었다.
레이저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무방비한 모습으로 등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팔런도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저는 등대와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가면 아래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등대 꼭대기에 서 있는 팔런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레이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