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레이저!”

그렇게 알들을 계속해서 깨트려가던 순간, 어둠의 끝자락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다시금 또렷하게 들려왔다.

레이저는 정신을 차렸다.

그순간 자신이 계단에 무릎을 꿇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야수와 같았다. 소녀의 외침에 차츰 잊고 있던 상처들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두 손은 자신과 적들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 너머 아직도 무기를 든 채 자신과 대치 중인 세 인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함부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저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거리를 둔 채, 팔런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런은 격렬하게 뛰는 가슴을 추스르며 발버둥치는 소녀를 붙잡아 끌고 왔다. 계단참 끝에 선 그는 레이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손이 얼마나 억세게 죄어오는지 소녀는 고통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저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그 나약한 생명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것이 지금 팔런의 손에 붙잡혀 언제든지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딘가 낯익은 장면이었다. 하사드가 다이애나를 사로잡았던 순간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무척이나 냉정했다. 마치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끝났다, 카멜레온. 여기까지다.”

팔런은 숨을 고르면서 음침한 눈빛으로 레이저를 노려보았다.

“내 요구 사항은 하나다. 소녀를 살리고 싶다면 네 목숨을 내놔라.”

“뭐라고요?”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죠? 전, 진짜 다이애나도 아닌데…….”

“당신 정체 따위를 누가 신경쓴단 말입니까? 나는 그저 저 배신자의 목숨만 취하면 될 뿐입니다.”

팔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경멸어린 어조로 말했다.

“저 남자가 죽지 않는 이상 우리 왕국은 영원히 정의를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아…….”

소녀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듯, 경악 어린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이자들이 노리는 게 당신이었던 거예요?”

“그만해.”

레이저는 다시 제정신을 되찾았지만, 그 뒤를 따라 뼈에 사무친 절망과 피로가 엄습해왔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제가 납치당했을 때? 아니면 그것보다 전인가요?!”

소녀는 격분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화난 것 같기도, 상심한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레이저는 고개를 떨궜다. 소녀의 호소가 가슴을 내찔렀다.

소녀가 자신을 믿지 못한 그 순간부터 신뢰를 되찾기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의 전말을 밝힌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라고 모든 걸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봤자,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레이저는 끊임없이 소녀를 구출할 방법을 떠올려봤지만, 그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력을 다해 내달린다고 할지라도 팔런에겐 소녀를 죽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처음엔 샤킬에게 납치를 당하질 않나, 그다음엔 다이애나에게 사지로 내몰리고, 지금은 또……레이저가 잠시라도 방심해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면 곧바로 위기에 빠지게 되다니. 마치 운명이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마저 바라는 대로 할 수 없는 걸까.’

“복수라. 무능한 국왕의 명령을 따르느라 그토록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할 가치가 있었나?”

레이저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끌며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윌리엄을 죽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시어도어 그자는 왕위를 찬탈할 놈이었다. 그자가 왕위를 탐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도 있나? 오히려 시어도어가 내게 감사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군.”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남자가 표정을 바꿨다. 눈에 크게 띄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을 뿐이었지만, 그 얼굴에서는 명백한 살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를 본 소녀는 순간 몸을 덜덜 떨었다.

줄곧 변화가 없던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눈에 크게 띄진 않았지만,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을 뿐인데도 명백한 살의가 피어올라 소녀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그동안 잘도 숨어 다녔더군. 후안 가의 고용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네놈을 찾아내는데 5년은 더 걸렸을 거다.”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연 팔런은 허리춤에서 빛처럼 빠른 속도로 단도를 꺼내들었다. 레이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단도가 소녀의 목을 겨눴다.

레이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말았다.